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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정보

일본군 포로 수용소 한 도망병의 증언 [오키나와 통신]

by cutekorean 2024. 3. 21.

목차

    일본 사이트에 올라온 내용의 번역으로, 기록이 소실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퍼온 글입니다.

    일본군 포로 수용소 한 도망병의 증언 [오키나와 통신]

    오키나와 통신 No13

    일본군 포로수용소

    한 탈영병의 증언
    오키나와전 중 동료와 함께 탈영하어 포로가 된 전 일본군이 어느 때 문득 말한 것이 내 뇌리에 걸렸다. 이겨서 기세가 오른 병사의 시선과 이중으로 둘러친 철조망 속의 일본군 포로 수용소에서 군인들이 행한 하극상이다.
    역사의 전환기, 사람은 다양한 인간상을 묘사하지만 일본군 포로 수용소에서 일어난 광경은 매우 이질적이었다. 각각의 인생관이나 마음의 추악함, 그리고 국가관까지 수용소라는 좁은 링 위에서 터졌다. 군복을 잡아 벗겼고 발가숭이가 되서 매일 미군으로부터 음식을 받는 남자들에게 이제 이런 관계가 없었다. 일본이라는 국가의 일그러진 생업 또한 각각의 출신이라는 형태로 얼굴을 내밀었다.
    병사들은 수용소 내의 장교 전용 막사에서 자신들의 상관을 차례로 오게 하며 땅바닥에 무릎꿇고 입을 묶은 채 때리거나 발로 차거나 린치를 가했다는."이놈아, 순순히 포로가 되다니.『 적에게 잡히느니 죽어라 』라고 한 건 어디의 어느 놈이야!"

    노호와 비명이 난무한다. 안에는 상관에게 직립 부동 자세를 명령하고 군인칙유나 전진훈을 달게 하거나 노래를 부르도록 하는 사람도 있었다. 전장에서 뽐내어 대던 상관이 부하가 시키는 대로 노래를 불렀다는 얘기도 있다. 계급의 차이를 빌미삼아 사사건건 자신들을 샌드백처럼 두들겼던 사람들에 대한 보복이다.
    쏟아지는 탄에, 일방적인 미군의 공격을 앞두고 투항하는 것도 용서되지 않으며 소모품과 다름없이 죽어간 병사들.그런 아수라의 문턱에서 살아온 그들이 포로 수용소에 들어서 맞은 최대의 충격은 얼마 전까지 자신들에 대한 권세를 휘두른 상관이 태연하게 "살아서 사로잡히는 수치를 당하는 것"이었다.

    일본군 포로 수용소 한 도망병의 증언 [오키나와 통신]

    오키나와 최대 수용소인 야카 포로 수용소는 일본인 동, 오키나와인 동, 조선인 동, 일본군 장교 동의 네 가지로 구분됐다.

    구분은 그들의 갈등을 고려한 것이었다. 미군이 생각해낸 것이지만 그것은 일본 오키나와, 조선의 근대사를 떠올리는 것이기도 했다. 스스로를 "순수한 일본인"이라 의식하면서 오키나와의 사람 위에 있다며 자신들을 평가하는 본토 출신 장병과 일본인의 "나쁜 씨"라고 취급받는 오키나와인. 게다가 본래는 어엿한 독립 민족인데 그 양쪽에서 억압 받는 조선인이라는 구도이다.
    본토 출신 장병들은 대체로 자신을 국가의 틀 속에 위치시키려는 경향이 강했다. 그것은 "8월 15일 이전의 투항자"과 "이후"의 투항자의 갈등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패전 이후 포로"는 자신들을 "천황 폐하의 명령으로 포로가 됐다"라며 정당화하고 "패전 이전의 포로"를 "진짜 포로", 즉 부끄러운 사람으로서 단죄했다. 비국민을 만드는 것으로 자신들의 계급을 높이려 한 것이다.
    하지만 오키나와인은 달랐다. 그들의 상당수는 일본과 일본인을 차가운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앞장서서 나라에 힘썼는데, 오키나와인에 대한 전장의 일본군의 눈은 불신과 의구심이 넘쳤다. 스파이로 간주되어 살해된 오키나와인이 얼마나 있었는지. 투항하려 해 뒤에서 총으로 살해된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 끝에 패전이다.
    오키나와 출신 병사들 중에서도 하극상에 가담한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일본군 병사 같은 "악의 보복"와는 달랐다..전장에서 부하에게 무모한 저항을 강요하거나 주민을 탐색 삼아 살해한 일본군 수비대 대장에 대한 항의 등이 그것이다. 즉 이치에 맞는 제재였다.
    명암이 뚜렷한 것은 일본군과 조선인 군대에서의 인부와의 관계였다. 전장에서 조선인 군대에서의 인부는 오키나와인보다 아래에 자리잡아 짐승같이 취급했다. 그런데 8월 15일을 기하고 그 입장은 완전히 역전됐다. 천황의 조칙에 의한 일본의 패전이 사실로 드러나자 일본인 동과 오키나와인 동은 물을 끼얹은 듯이 조용해졌다. 그러나 조선인 동에서는 빈 깡통을 두드리고 환희에 들끓었다. 그리고 그날부터 일본인 장교에 대한 린치가 시작되었다.

    그들은 36년에 이르는 "일제 강점기"의 민족의 원망과 분노를 한꺼번에 폭발시킨 것이다.

    일본군 포로 수용소 한 도망병의 증언 [오키나와 통신]

    사상의 전환

    수용소의 관리에 해당하는 미군들은 이러한 포로들의 각양각색의 심리를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류큐와 조선의 역사를 잘 공부했다."일본에 침략당한 민족"인 오키나와인과 "일본의 식민지화된 민족"인 조선인에게는 호의적으로 대응했으나 본토 출신의 장병들에게는 적의를 드러내고 맞섰다.

    개중에는 오키나와인 동 변소 청소를 일본군 장교에게 맡긴 자도 있었다. 미군들은 말끝마다 일본군을 "도조 잇세"라고 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그것은 "도조 똥을 먹는다"라는 뜻이었다고 한다. 도조는 나중에 미국이 "A급 전범"으로 교수형을 집행한 대전 당시 총리 대신 겸 육군 장관 도조 히데키이다.
    한편 사로잡힌 측의 심리는 그들이 수용소로 팔렸을 때 보였던 표정에 나타났다. 조선인과 오키나와인은 안도의 표정을 드러내고 밤낮으로 죽은 듯이 자기를 계속했다.
    이에 대한 일본인 장병들은 극도의 긴장에 표정을 굳게,"자신들은 언제 죽을 것인가"라는 불안에 휩싸여 일을 계속했다. 전쟁 중 부당 행위를 저지른 사람도"내일의 자신"을 두려워했다. 많은 사람이 가명을 썼다.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기보다와 도피를 꾀하다 사살된 자도 있었다.
    "패전 이후 포로"가 진행되고 포로의 차별화에 달린 것은 천황의 후원자를 얻는 것으로 신변 안전을 도모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철조망으로 나누어지고 정확한 정보도 없는 좁은 수용소에서 "전쟁 전"에서 "전쟁 후"로, 군국주의에서 민주주의로 가치관을 180도 바꾸는 것도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그것에 붙여도 수용소에서 패전 직후에 오른 일본 오키나와, 조선 3자 각각의 정신 풍경은 반세기를 거친 이후에도 거의 바뀌지 않은 것을 깨닫는다. 이 3자의 융합의 핵이 되어야 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이 "일본"이다.
    나에게 수용소 내의 하극상에 대해서 말한 사람 중에 한 적전 도망병이 있었다. 이 사람은 간사이 출신이지만 이 사람의 전선 이탈 이유는 "목숨이 아까웠다"라고 한다. 한편 이 사람과 행동을 함께 한 오키나와 출신 병사의 도피 이유는 "일본에 대한 불신"이었다. 여성이나 아이를 위험한 벙커 밖으로 몰고 태연하고 부끄럼 없는 일본군의 모습을 그는 전선에서 응시했다. 일본군에 대한 분노와 군대를 통해서 보이는 일본.
    국가에 대한 절망이 그에게 총을 버리게 했다.
    이는 자신의 안전 때문에 오키나와만 군사 기지의 위험과 고통을 강하게 계속 오늘의 일본과 오키나와의 관계에 그대로 겹쳐진다. 오키나와 문제의 뿌리 깊음을 느끼게 해주는 구도다.

    원문 출처 : 日本軍捕虜収容所 ある逃亡兵の証言 [沖縄通信]


    日本軍捕虜収容所 ある逃亡兵の証言 [沖縄通信]

     日本軍捕虜収容所

    ある逃亡兵の証言
     沖縄戦のさなか、仲間とともに敵前逃亡し捕虜になった元日本兵が、ある時ふと話したことがぼくの脳裏にひっかかっている。勝ち誇った兵士の視線と、二重に張りめぐらされた鉄条網のなかの日本軍捕虜収容所で兵士たちが演じた下克上のことである。
     歴史の転換期、人はさまざまな人間模様を描き出すが、日本軍捕虜収容所のなかで演じられた光景はたいそう直截的であった。それぞれの人生観やこころの醜さ、そして国家観までが収容所という狭いリングの上で噴き出した。軍服をはぎとられ、まる裸にされて日々米軍から食べ物をあてがわれる男たちに、もう上下関係はなかった。日本という国家の歪んだなりわいもまた、それぞれの出自というかたちで顔を出した。
     兵士たちは、収容所内の将校専用幕舎から自分たちの上官をつぎつぎと引き出しては地べたに土下座させて口々になじり、殴ったり蹴り飛ばしたりのリンチを加えたという。「貴様ァ、よくおめおめと捕虜になんかなりやがって。『敵に捕まるぐらいなら死ね』と言ったのはどこのどいつなんだ!」
     怒号と悲鳴が飛び交う。なかには上官に直立不動の姿勢を命じ、軍人勅諭や戦陣訓を唱えさせたり、うたを歌わせたりする者もいた。戦場で威張りまくっていた上官が部下に命じられるがままに《勘太郎月夜》を歌わされたという話もある。階級の違いをよいことに、何かにつけ自分たちをサンドバックのように殴りつけた者たちへの報復である。
     降り注ぐ弾雨と一方的な米軍の攻撃を前に、投降することも許されずボロ布同然に死んでいった兵士たち。そんな修羅の淵から生還した彼らが捕虜収容所に入って受けた最大の衝撃は、ついこのあいだまで自分たちに対し権勢をふるった上官が、平然として「生きて虜囚の辱めを受け」ていることであった。

    沖縄最大の収容所である屋嘉捕虜収容所(写真/屋嘉日本軍捕虜収容所の全景・金武町屋嘉)は日本人棟、沖縄人棟、朝鮮人棟、それに日本軍将校棟の四つに区分けされていた。区分けは彼らの対立に手をやいた米軍が考えだしたものだが、それは日本、沖縄、朝鮮三すくみの近代史を浮かび上がらせることともなった。自らを「純粋な日本人」と意識し、沖縄の人の上に自分たちを位置づける本土出身将兵と、日本人の"悪種"としかみられない沖縄人。それに、本来はれっきとした独立民族なのにその双方から虐げられつづけた朝鮮人という構図である。
     本土出身将兵は、概して自分を国家の枠組みのなかに位置づけようとする傾向が強かった。それは「8月15日以前の投降者」と「それ以後」の投降者の確執というかたちで表れた。"敗戦以後の捕虜"は、自分たちを「天皇陛下の命令で捕虜になった」と言って正当化し、"敗戦以前の捕虜"を「本物の捕虜」、つまり恥ずべき者として断罪した。非国民をつくることで自分たちのグレードを高めようとしたのだ。
     だが沖縄人(うちなーんちゅ)は違った。彼らの多くは日本や日本人を冷めた目で見ていた。身を挺して国に尽くしたはずだったのに、沖縄人に対する戦場の日本兵の目は不信と猜疑心に満ちていた。スパイとみなされて殺された沖縄人がどれほどいたか。投降しようとして背後から銃で撃ち殺された者も少なくはなかった。そのあげくの敗戦である。
     沖縄出身兵士のなかにも下克上に加わった者はいる。しかし、日本軍兵士のような「むやみやたらの報復」とは違った。戦場で部下に無謀な抵抗を強いたり、住民をスパイ視して殺害したりした日本軍守備隊隊長への抗議などがそれである。つまり、理にかなった制裁であった。
     明暗がきわだったのは日本兵(軍)と朝鮮人軍夫との関係であった。戦場での朝鮮人軍夫は沖縄人より下に位置づけられ、牛馬のような扱われ方をした。ところが、8月15日を期してその立場は完全に逆転した。天皇の詔勅により日本の敗戦が事実とわかると、日本人棟と沖縄人棟は水を打ったように静まり返った。しかし朝鮮人棟では空き缶を打ち鳴らして歓喜にわいた。そしてその日から日本人将校へのリンチがはじまった。彼らは36年に及ぶ"日帝支配"に民族の恨みと怒りを一気に爆発させたのだ。

    思想の転換

    収容所の管理にあたる米兵たちは、こうした捕虜たちの三者三様の心理をよく見抜いていた。彼らは琉球や朝鮮の歴史をよく勉強していた。「日本に侵略された民族」である沖縄人と「日本の植民地にされた民族」である朝鮮人には好意的に対応したが、本土出身の将兵には敵意をむき出しにして立ち向かった。

     なかには、沖縄人棟の便所掃除を日本軍将校にさせた者もいた。米兵たちはことあるごとに日本兵を"東条一世" と罵った。あとでわかったことだが、それは「東条糞食らえ」という意味だったという。東条とは、後にアメリカが「A 級戦犯」として絞首刑にした大戦当時の総理大臣兼陸軍大臣の東条英機のことだ。
     一方、捕われた側の心理は、彼らが収容所に送り込まれた時に見せた表情に現れていた。朝鮮人と沖縄人は安堵の表情を垣間見せ、昼も夜も死んだように眠りつづけた。
     これに対し日本人将兵は極度の緊張に表情をこわばらせ、「自分たちはいつ殺されるのか」との不安に襲われつづけた。戦時中に不当行為を犯した者ほど"明日の我が身"を恐れた。多くの者が偽名をつかった。座して死を待つよりはと、逃亡をくわだて射殺された者もいた。
     "敗戦以後の捕虜"が進んで捕虜の差別化に走ったのは、天皇の後ろ楯を得ることで身の安全を図ろうとしたためであった。
     鉄条網で仕切られ、正確な情報もない狭い収容所のなかで「戦前」から「戦後」へ、軍国主義から民主主義へ価値観を180度換えることもまた、至難の業であっただろう。
     それにつけても、収容所のなかで敗戦直後に浮かび上がった日本、沖縄、朝鮮三者それぞれの精神風景は半世紀を経た以後もほとんど変わっていないことに気づく。この三者の融合の核にならなければならないのは、言うまでもなく「日本」なのに、である。
     ぼくに収容所内の下克上について語った人のなかに、一人の敵前逃亡兵がいた。この人は関西の出身だが、この人の戦線離脱の理由は「命が惜しかった」からだという。一方、この人と行動を共にした沖縄出身兵士の逃亡理由は「日本への不信」であった。女性や子供を危険な壕の外へ追いやって恬として恥じることのない日本軍の姿を、彼は戦線で見つづけてきた。日本軍に対する怒りと、軍隊を通して見える日本ーーー。
     国家への絶望が彼に銃を捨てさせた。
     この図式は、自らの安全のために沖縄にのみ軍事基地の危険と苦しみを強いつづける今日の日本と沖縄の関係にそのまま重なり合っている。沖縄問題の根の深さを感じさせる構図である。

    태평양 전쟁에서 가장 끔찍했던 전투, 군인보다 민간인이 더 많이 죽은 오키나와 전투

    태평양전쟁 말기 미군에 항복한 오키나와의 일본군 포로들과 포로 수용소 연합군 UN Allied Forces
    오키나와 전투. 태평양전쟁 중 가장 잔인하고 비극적인 전투 사건탐구 과거탐구 STGT

    전쟁은 그저 참혹하고 끔찍할 뿐이며 침략 전쟁에는 아무런 영광도 없습니다.

    군국주의는 인류가 발로 밟아 딛고 일어서야할 추악한 과거로, 어떠한 문제를 전쟁으로 해결하려고 해서는 절대 안됩니다.

    오로지 대의를 가지고 영토와 인명을 지켜내는 군인들만이 명예로울 뿐이며, 우리는 약탈과 점령을 위한 잔혹한 폭력에 맞서 대항해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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