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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식습관과 대변으로 인한 죽음, 나비효과로 엉망이 된 동북아시아 전쟁사
한국 사람들에게 가장 유명한 일본 전국시대 인물은 임진왜란, 정유재란으로 조선을 두 번이나 침공해 한민족에게 끔찍한 아픔을 주었던 원수,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 풍신수길)가 있습니다.
그리고 일본사에 조금 더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집권하기 전 일본 전역 통일이라는 위업을 달성하기 직전 혼노지의 변(本能寺の変)으로 사망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직전신장)를 알고 계실 것입니다.
또한 홀로 몰래 힘을 모으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거대한 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뒤엎고 약 200년간 존속하는 에도 막부를 건립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덕천가강)도 알고 계실 것입니다.
이 세명의 인물을 일본사에서는 가장 유명한 영웅으로 취급하고, 역사 속에서도 가장 중요한 시대로 다루며, 이 인물들을 평가하며 묘사한 고전시가에서는 이들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에도 시대 히라도 번주 마쓰라 기요시(松浦清, 1760~1841)의 수필 '갑자야화(甲子夜話)' - 출처 : 나무위키
なかぬなら 殺してしまへ 時鳥 - 織田右府
울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노라 시조여 - 오다 우후(오다 노부나가)
鳴かずとも なかして見せふ 杜鵑 - 豊太閤
울지 않으면 울려 보이마 두견아 - 호타이코(도요토미 히데요시)
なかぬなら 鳴まで待よ 郭公 - 大権現様
울지 않으면 울 때까지 기다리마 곽공이여 - 다이곤겐사마(도쿠가와 이에야스)
여기서 시조(時鳥), 두견(杜鵑, =진달래), 곽공(郭公)은 모두 두견새를 가리키며, 울지 않는 두견새를 울리기 위해 오다 노부나가는 죽이겠노라고 협박할 것이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울도록 구슬릴 것이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울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표현하여 세 인물의 상반된 성격을 센류(川柳)라는 시가의 형태로 나타내었습니다.
이들은 동북아 3국의 정세를 가장 크게 바꾸어놓은 임진왜란, 정유재란에 직, 간접적으로 얽힌 인물들이기에 한중일 3국에서 모두 중요하게 다룹니다.
그러나 이들의 시대가 오기 전, 이들보다 훨씬 더 큰 맹위를 떨친 무장들이 있었습니다,
숙명의 라이벌 우에스기 겐신과 다케다 신겐
우에스기 겐신(上杉謙信)과 다케다 신겐(武田信玄)은 전국시대 당시 가장 강력한 군주이자 무장이었습니다.
일본에서는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이어 이 두 사람, 우에스기 겐신과 다케다 신겐이 가장 인지도도 높고 인기도 많은 라이벌입니다.
우에스기 겐신은 에치고의 용(越後の龍), 다케다 신겐은 카이의 호랑이(甲斐の虎)라는 별명을 각각 가지고 있었으며, 용호상박(龍虎相搏)이라는 말로 그들의 세력이 팽팽하게 유지되었음을 표현합니다.
배신과 암살, 모략이 횡행했던 전국시대에 홀로 도덕적이고자 했던 우에스기 겐신
특히 더욱 강렬하게 대비되는 것은 그들의 성격인데, 후계구도에서 밀려난 우에스기 겐신은 어릴 적 린센지(林禪寺, 임선사)라는 금욕적이고 여성을 배척하며 욕망을 자제하는 수행을 강요하는 엄격한 분위기의 사찰에서 자라났습니다.
이로 인해 우에스기 겐신은 시, 서화, 유학과 예절 등을 익혀 글과 교양을 갖춘 무사가 되었는데, 이것은 살육과 배신으로 점철된 무식한 무사들의 시대였던 전국시대에는 굉장히 특이한 케이스였습니다.
성격 또한 맹목적으로 실리를 따지기보다 상대적으로 명분과 정의, 이타주의에 입각한 결정을 내려 동시대의 다른 무장들과는 상당히 비교되는 독특한 행보를 보입니다.
스스로를 불교의 신인 비사문천(毘沙門天, びしゃもんてん)의 화신이라고 믿었기에 도덕적으로 행동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종종 보이며, 전쟁에서의 맹위 또한 대단해 동국의 군신(軍神), 서국의 뇌신(雷神) 등의 별명을 얻었습니다.
일본의 유명한 속담인 '적에게 소금을 보내다.(敵に鹽を送る, 테키니 시오오 오쿠루)'라는 문장도 우에스기 겐신에게서 비롯된 말입니다.
우에스기 겐신과 다케다 신겐이 치열하게 대립각을 세우며 적대하고 있던 1567년, 다케다 영지는 주변국들의 미움을 사 소금 금수조치를 당하게 됩니다.
바다와 인접하지 않은 내륙이었던 다케다 영지는 중요자원인 소금이 부족해 곤란을 겪게 됩니다.
이에 우에스기 겐신은 '내가 겨루는 것은 창과 칼이지 소금이 아니다.'라는 편지와 함께 소금을 보내주었고, 다케다 신겐은 이에 감사를 표하며 명도를 보내어 답례했다고 합니다.
이 명도는 '소금의 칼(塩留めの太刀, しおどめのたち, 시오도메노 타치)'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으며, 약 300년간 우에스기 가문에서 보관하다 니가타현 출신의 사업가 와타나베 요시스케(渡辺義介)씨가 입수하게 되어 1955년 도쿄 국립 박물관에 기증하였습니다.
일본 문화재청에 등록된 정식 명칭은 비젠1문자히로(備前一文字弘, びぜんいちもんじひろ, 비젠이치몬지히로)입니다.
드라마 풍림화산에서 천재적이고 다재다능한 미소년으로 변모한 우에스기 겐신의 이미지
NHK 드라마 풍림화산(風林火山)에서는 가수 각트(Gackt)가 장발을 길게 늘어뜨리고 우에스기 겐신 역을 맡아 연기하여 시대극에 맞지 않는다는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습니다.
실제 우에스기 겐신은 절에서 자랐기에 평상시에도 머리를 두건으로 감싸는 승려의 복장으로 지냈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정의롭고 잘생겼으며 싸움도 잘하는 4차원의 독특한 성격을 가진 우에스기 겐신이라는 매력적인 캐릭터는 일본 여성들에게 너무나도 큰 인기를 끌었고, 이 인기에 힘입어 가수 각트씨는 매년 4월 상순 니가타현 조에쓰 시 가스가야마 성터 주변에서 벌어지는 겐신 공 축제에서 우에스기 겐신을 연기하며 관광객들을 모았습니다.
무적의 기마부대로 엄청난 무용을 펼쳤지만 눈앞의 이득을 위해 배신을 일삼았던 다케다 신겐
2007년 NHK에서 방영된 대하드라마 풍림화산(風林火山)은 본디 병법서 '손자'의 '군쟁'편에 나오는 구절을 축약한 것입니다.
원문은 기질여풍(其疾如風, 바람처럼 빠르게), 기서여림(其徐如林, 숲처럼 고요하게), 침략여화(侵掠如火, 불길처럼 맹렬하게), 부동여산(不動如山, 산처럼 묵직하게)이며 상황에 따라 군사를 적절히 운용해야 승리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손자 병법을 깊이 탐독하고 신봉했던 다케다 신겐의 전술정신으로 차용되어 疾如風, 徐如林, 侵掠如火, 不動如山라고 쓰여있는 깃발을 항상 내걸었다고 전해지며, 일본에서는 다케다 신겐을 상징하는 말로도 사용됩니다.
영지 내에서 전쟁이 벌어지면 반드시 사람이 죽거나 건물이 불타는 등 물적, 인적 생산 기반이 파괴됩니다.
하지만 다케다 신겐은 적이 카이 영내로 침범해 오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으며, 늘 침략 전쟁을 벌여 영지 밖에서 싸웠기 때문에 카이 지역에서는 그에 대한 평가가 하늘을 찌릅니다.
다케다 기마대는 다리가 짧고 뭉툭하게 생긴 작은 말을 탔지만 대부분의 군대가 경보병인 아시가루(足軽) 위주의 편제로 운영되었던 전국시대 당시에는 무시무시한 무적의 기마부대로 불렸습니다.
훌륭한 기마전술에 더하여 다케다군 전체의 전투력 또한 대단해 승률도 높았으며, 전술, 전략, 정치적으로도 뛰어난 맹장으로 평가되지만, 자신의 아버지를 축출하고 권력을 계승한 사건과 함께 일생동안 워낙 뒤통수 치는 배신행위를 수시로 일삼아 그가 죽고난 뒤 카이(코슈 지방)는 온통 적으로 둘러싸인 형국이 되어버렸습니다.
다케다 신겐 본인은 적으로 둘러싸여 있어도 모두 무찔러 버리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가 급사한 뒤 전투력을 유지할 수 없었던 카이 지역은 급격히 무너져 오다 노부나가에게 가문이 멸족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다케다 신겐은 카이 지역(현 야마나시현)에서는 난세인 전국시대에 뛰어난 군략으로 영민의 피해를 최소화 한 최고의 무사로 추앙받고 있으며, 다른 무장들보다 더욱 뛰어난 무신으로 모셔지고 있습니다.
야마나시현 고후시에서는 매년 다케다 신겐의 기일인 4월 12일에 1600여 명에 달하는 무사 코스프레를 한 행렬이 행진하는 신겐 공 축제를 벌입니다.
우에스기 겐신과 다케다 신겐이 필생의 라이벌이 되었던 가와나카지마 전투
가와나카지마(川中島)는 지쿠마가와(千曲川)와 사이가와(犀川)가 합류하는 삼각지대의 평지로, 두 개의 강이 실어온 토양이 퇴적되어 비옥한 대지였으며 풍족한 쌀 수확량 뿐만 아니라 보리의 이모작, 연어와 같은 민물 어종 자원 또한 풍부한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우에스기 겐신의 에치고 지역과 다케다 신겐의 카이 지역 사이에 끼어있는 현 나가노 시 지역이며 군사적, 경제적으로도 중요한 요충지였던 가와나카지마를 차지하지 위해 다섯 번의 전투가 벌어집니다.
그러나 1차 전투(1553년 후세 전투, 布施の戦い), 2차 전투(1555년 사이카와 전투, 犀川の戦い), 3차 전투(1557년 우에노하라 전투, 上野原の戦い), 5차 전투(1564년 시오자키의 대진, 塩崎の対陣)의 경우 우열을 가리기 힘든 팽팽한 대치 상황 아래서 전면전이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흔히 가와나카지마 전투라고만 하면 1561년 가와나카지마 하치만바라 지역에서 벌어진 제4차 가와나카지마 전투, 하치만바라 전투(八幡原の戦い)를 칭하는 경우가 많습니다.4차 가와나카지마 전투는 피로 피를 씻는 혈전이었으며, 거대한 양 군세가 전면전을 벌이고 복잡하게 얽혀가는 전쟁 도중 물고 물리는 지략 싸움이 돋보인 무시무시한 대회전이었습니다.
Sengoku Jidai: Battle of Kawanakajima 1561
특히 이 전투에서는 우에스기 겐신이 다케다 신겐의 계획을 예측하고 안개 속에서 몰래 기동한 뒤 순식간에 적 앞에 나타나 기습하여 군의 총 대장인 다이묘의 본대끼리 맞붙은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때 방어태세가 갖추어지지 않은 다케다 본대를 우에스기 겐신이 말을 타고 돌진하여 직접 다케다 신겐을 공격했다고 전해집니다.
이렇게 병졸 없이 무사끼리 싸우는 일대일 대결은 일본어로 일기토(一騎打ち, 잇키우치, 무사가 1대1로 싸우는 것)라고 합니다.
전국시대 전쟁 중에 직접 무사들이 맞대결 하는 경우는 흔치 않았기에 일본에서는 이러한 일을 굉장히 낭만적인 싸움으로 여겼고, 우에스기 겐신과 다케다 신겐의 직접 맞부딪힘 또한 실재했는지 의견이 분분하지만 이 장면을 묘사한 최초의 기록이 사료가 아닌 소설로 밝혀지면서 현재 일본 사학계에서는 '있었을지도 모르는 가공의 사건'으로 여겨집니다.
이때 미처 진영 정비를 마치지 못한 다케다군은 총지휘관이 적진에 노출되었고, 이를 급습한 우에스기 겐신은 단신으로 달려가 마상에서 다케다를 내리쳤다 전해지는데, 미처 칼을 빼어들 시간조차 없었던 다케다 신겐은 쇠로 만든 지휘용 쥘부채, 철선(軍配, 군바이)을 들어 최초의 일격을 막아냈다고 합니다.
이후 두 합을 더 내리친 우에스기 겐신은 다케다 신겐의 팔과 어깨에 부상을 입히지만 결국 죽이지는 못하고 물러나야 했다고 전해집니다.
이 사건은 정확한 고증이 존재하지 않는 소문에 불과하지만 일본에서는 오랜 숙적이 서로 가까이에서 대면하여 숙명적으로 맞붙은, 굉장히 멋지고 감동적인 대결로 여겨져 실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고 밝혀진 현재까지도 사실이라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전국시대를 끝내고 일본을 통일할 것이라 여겨졌던 두 영웅의 죽음
다케다 신겐의 죽음, 연이은 대승 직후 돌연사
다케다 신겐이 권력의 상징적 중심지였던 교토 지방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오다 가문의 영지 오와리를 거쳐야만 했습니다.
다케다 신겐은 오다 노부나가에게 화친의 편지를 보냈지만,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이나 다름없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영지 미카와와 도토미를 대대적으로 침공하면서 뒤통수를 쳤습니다.
1572년 음력 10월 13일, 주변 영지들과의 분쟁으로 발이 묶인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다케다 신겐의 2만 7천에 이르는 대군이 공격하여 다다라이 성, 아마카타 성, 이치노야 성, 이이다 성, 가쿠와 성, 무사카 성 등 도쿠가와의 성들을 하루 만에 정복합니다.
공격당하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지원하기 위해 오다 노부나가는 가신과 지원군을 파병하여 약 1만명의 연합군이 모였지만 고전을 면치 못하다 패퇴를 거듭합니다.
1572년 음력 12월 22일,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가신들의 만류와 전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도토미의 미카타가하라 지역에서 다케다 군과 대군이 맞붙는 대회전을 벌이게 되고 치욕적인 대패를 당하게 됩니다.
도쿠가와 군의 사망자는 2천, 다케다 군의 사상자는 약 200명으로 추산되며,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다케다 군은 도망치는 도쿠가와 군의 뒤를 쫓아 완전히 궤멸시켜 버립니다.
이 때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공포에 질려 도주하다 바지에 대변을 지렸는데, 이 치욕을 잊지 않고자 볼품없이 우거지상을 쓰고 있는 찡그린 표정을 그대로 그려 그림으로 남기게 하였습니다.
이 그림은 이에야스의 우거지상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교만과 섣부름을 경계하는 상징적인 그림으로 일본 미술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됩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미카타가하라 전투의 패인이 자신의 성급함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이 그림을 남겨 완벽한 때가 아니면 섣불리 행동하지 않겠다는 신념을 가지게 됩니다.
연이은 패배로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이 붕괴 직전에 이르게 된 1573년 음력 2월10일, 노다 성(野田城)을 접수한 직후 다케다 신겐의 지병이 돌연 악화되어, 다케다 군 전체가 진격을 멈춥니다.
다케다 신겐은 건강을 돌보기 위해 나가시노 성(長篠城)에서 요양했지만 별 차도가 없었고, 어쩔 수 없이 카이로 철군하는 도중 음력 4월 12일 시나노국 고마바(駒場)에서 향년 53세로 병사합니다.
그의 죽음은 너무나도 급작스럽게 진행되어 현재까지도 많은 의문이 남아있는데, 그의 지병이 폐결핵, 폐렴, 위암, 식도암이었을 것이라는 수많은 추측만이 제기될 뿐 확실하게 밝혀진 것은 없습니다.
혹자는 당시 예수회가 기독교에 호의적인 오다 노부나가를 지원하기 위해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다케다 신겐을 독살하였다는 음모론까지 제기할 정도로 그의 죽음은 급작스러운 것이었고, 연이은 패배로 며칠째 잠을 이루지 못했던 오다 노부나가는 다케다 신겐의 부고를 듣고 3일 내리 편안한 잠을 이룰 수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우에스기 겐신의 죽음, 역시 오다 노부나가 괴멸 직전 벌어진 급사
우에스기 겐신은 특이하게도 여성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받는 무장입니다.
여성적인 필체, 연애 소설을 즐겨 읽고 당시 고급 안료에 속했던 붉은 색을 좋아하는 취향, 한달에 한 번 꼴로 약 10일간 복통을 호소했다는 설로 인해 생리통을 앓았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평소 수행자처럼 소량의 밥 한공기, 국 한그릇, 반찬은 우메보시(梅干, うめぼし, 매실장아찌) 한 종류로만 식사를 했다고 전해지며, 전투가 다가올 때에만 식사량을 크게 늘렸다고 전해집니다.
평상시에는 20% 이상의 비율로 소금에 매우 짜게 절여진 우메보시를 안주삼아 과음하는 것을 즐겼다고 전해지는데, 복통이 생기지 않는 것이 이상한, 완전히 망가진 식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에스기 겐신은 간헐적 폭식과 과음, 지나친 나트륨 섭취 등으로 40대 부터 중풍을 앓았으며, 잦은 음주로 인한 식도암, 위암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도 제기됩니다.
숙명의 라이벌이었던 다케다 신겐이 1573년 사망한 후 엣추국(越中国, 엣추노쿠니, 현 도야마 지역) 대부분을 흡수하고, 1576년부터 오다 노부나가와의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됩니다.
오다군 3만 군세를 순식간에 궤멸시키고 대규모 침공 준비태세를 갖추던 찰나 급사한 우에스기 겐신
1577년, 오다 노부나가는 휘하의 장수 시바타 가쓰이에(柴田勝家)를 총대장으로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 다키가와 가즈마스(滝川一益), 니와 나가히데(丹羽長秀), 마에다 토시이에(前田利家), 삿사 나리마사(佐々成政) 등 자신이 신뢰하는 최정예 장수들과 3만 여 명의 군세로 우에스기 겐신에게 대항합니다.
그러나 우에스기군이 이미 주변의 여러 성채와 진지를 모두 점령하고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오다군은 패닉에 빠졌고, 오다군의 총대장 시바타 가쓰이에가 후퇴명령을 내리게 됩니다.
1577년 9월 23일 밤, 허둥지둥 후퇴하며 데도리 강(手取川, 데도리카와)을 건너던 오다군은 데도리카와 전투에서 우에스기 군의 습격을 받아 패퇴합니다.
1577년 12월 18일, 겐신은 가스가 산성(春日山城)으로 귀환하고, 5일 뒤인 12월 23일에는 다음 원정을 위한 대규모 동원령을 포고합니다.
그러나 오다 노부나가를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던 우에스기 겐신의 야망은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1578년 3월 13일 오후 2시, 우에스기 겐신은 향년 49세로 가스가 산성의 화장실에서 쓰러져 혼수상태에 빠졌고, 회복하지 못한 채 그대로 사망합니다.
큰 전투를 앞두고 돌연사 한 우에스기 겐신, 에치고의 용이 허망하게 지다
사료에 기록된 바로는 눈이 오는 날 뒷간에서 쓰러졌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현대의 많은 학자들은 고혈압으로 인한 뇌출혈이 사인일 것이라 추측됩니다.
당시 화장실은 쪼그려 앉아 변을 봐야 했고, 고혈압인 사람에게는 쪼그려 앉는 자세 자체가 실신이나 사망까지도 유발할 수 있는 위험한 자세입니다.
눈이 내리는 추운 날씨에 쪼그려 앉아서, 대변을 보기 위해 힘을 주는 바람에 혈압이 높아져 뇌 혈관이 터지고 뇌일혈을 일으켰을 가능성이 가장 신빙성 있는 추측으로 여겨집니다.
쉽게 요약하자면 똥 싸다가 죽은 것인데, 전국시대를 휘저었던 영웅의 말로 치고는 초라하기 그지없지만 평소 심하게 짜게 먹고 소식과 폭식을 오가며 술까지 과음했던 엉망진창의 식습관을 고려한다면 오히려 그동안 많은 전쟁터에서 높은 무용을 펼치는 등 멀쩡하게 활동했던 것이 오히려 이상하게 여겨집니다.
오늘날에는 추위와 배변 시 힘주는 행위가 겹쳤을 때 뇌 혈관이 터질 수 있음을 많은 사람이 인지하고 있음에도 대변을 보다 사망하는 경우는 생각보다 흔하게 발생합니다.
두 거물의 죽음으로 큰 이득, 어부지리를 얻게 된 일본 통일의 주역 오다 노부나가
아직 미숙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던 오다 노부나가는 자신의 세력확장에 가장 크고 거대한, 넘을 수 없는 벽으로 자리잡고 있던 다케다 신겐과 오다 노부나가가 절망적인 위기상황에 처한 도중 연이어 급사하여 죽어나갔으니 본인으로서도 의아하게 생각할만한, 하늘의 도우심이 작용한 천운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가 없었습니다.
전쟁은 지휘관의 역량에 큰 영향을 받습니다.
다케다와 우에스기 사후 그들의 영토는 비록 모두 점령하지 못했지만, 이미 오다 가문의 진격을 막을만큼 뛰어난 군략을 지닌 다이묘와 장수는 일본 내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오다 노부나가에게 거대한 정신적 트라우마를 안겨주고, 자다가도 악몽으로 공포에 질려 벌떡벌떡 일어나게 만들 정도의 PTSD를 안겨주었던 두 맹장 다케다 신겐과 우에스기 겐신 사후, 오다 노부나가는 파죽지세로 주변국을 정벌해 나갑니다.
그러나 교토로 향하던 오다 노부나가가 하룻밤 기거했던 혼노지에서 암살당하는 혼노지의 변(本能寺の変) 사건이 일어나자, 주군의 죽음을 확인하자마자 오다 가문의 모든 권력과 재산을 약취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결국 일본 통일이 이루어집니다.
오다 노부나가가 평생을 투자해 정성스럽게 차려놓은 밥상을 맛있게 다 먹은 것은 그가 평생 하찮은 시종으로 여겼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된 것입니다.
노부나가 사후, 서자이지만 오다가의 3남이었던 오다 노부타카를 후계자로 지지했던 오다군 총사령관 시바타 가츠이에는 노부나가 후계자 결정 회의였던 키요스 회의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3살 밖에 되지 않았던 노부나가의 적손자 산보시를 추대해 후계자로 옹립하는데 성공하자 순식간에 막강한 정치적 발언권을 얻게 되었고, 시바타 가츠이에와 도요토미 히데요시 간의 전쟁이 벌어집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최측근, 시즈가타케 칠본창이 탄생한 시즈카타케 전투
시즈가타케 칠본창(賤ヶ岳の七本槍, 시즈가타케노 시치혼야리, 혹은 나나혼야리)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시중을 들던 시동 출신 7명의 무장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직접 교육하고 깊이 신뢰했던 7명의 무사들입니다.
이들의 이미지는 정예 중에서도 고르고 골라 만들어진 최정예병이라는 이미지가 붙어 현대까지도 캐릭터 상품 및 각종 영화나 드라마 컨텐츠로 제작되는 주역입니다.
그러나 수십년간 서로 죽이고 모략하는 것만 생각해야 겨우 살아남을 수 있었던 끝없는 전쟁지옥, 전국시대에서 엘리트 중의 엘리트로 선발된 이 일곱명 중 아래쪽 네명은 일본 통일 이후 임진왜란으로 조선에 파병되어 모두 이순신에게 쪽도 못 쓰고 처참하게 격파당하였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시바타 가츠이에를 무찌르며 일본을 통일합니다.
통일전쟁이 끝난지 얼마 되지않은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명나라를 정벌하러 갈테니 길을 비켜달라는 정신나간 요구사항을 조선에 전달하며, 오랜 전쟁 속에서 내실 안정과 복구작업도 채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대규모 정벌을 벌이게 됩니다.
이로 인해 조선, 명, 일본의 동북아시아 주요 3대 강대국들이 국가의 존망을 건 전면전을 한반도에서 전개하면서 한민족들은 큰 시련과 고난을 겪게 됩니다.
만약 다케다 신겐이나 우에스기 겐신이 급사하지 않았다면 역사는 어떻게 뒤바뀌었을까?
많은 일본인들이 일본사를 공부하며 제기하는 의문입니다.
만약 다케다 신겐이나 우에스기 겐신 둘 중 한명이라도 급사하지 않았더라면, 오다 노부나가가 일본 통일의 발판을 마련할 일은 요원한 상황이었을 뿐만 아니라 목숨조차 부지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특히 우에스기 겐신은 많은 사람에게 인망을 인정받은 덕장으로 평가받는 인물이기에, 이른 나이에 똥 싸다 죽은 부끄러운 말로를 보이지만 않았더라면 아마도 합리적인 통치방식으로 일본을 잘 이끌어 나갔을지도 모른다는 대체 역사 망상글이 일본 커뮤니티에 자주 올라옵니다.
결론적으로 다케다 신겐과 우에스기 겐신이 돌연사하는 바람에 큰 덕을 보게 된 오다 노부나가가 통일의 기틀을 마련하고, 오다 사후 오다 가문의 모든 것을 빼앗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집권발판을 마련하지 못했더라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군신 우에스기 겐신의 잘못된 응가 힘주기 한 번에 이후 동북아시아 전체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손아귀에서 일어난 끔찍한 전쟁의 화마로 고통받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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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24 - [생활 정보] - 임진왜란 전후 몇몇 일본 전국시대 무장들의 이름, 한국식 발음과 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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