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임진왜란 전후 몇몇 일본 전국시대 무장들의 이름, 한국식 발음과 별명
일본 전국시대 무장들의 이름은 한자로 쓰여있기에 한국식 발음으로 읽었을 때 일본식 발음과 크게 차이가 나서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한국식으로 읽은 몇몇 일본 전국시대 무장들의 이름과 별명을 알아보겠습니다.
기본적인 정보는 나무위키에서 참조했습니다.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직전신장), 제육천마왕(第六天魔王) 또는 아카오니(赤鬼)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한자를 한국식 발음으로 읽으면 '직전신장'이 되며, 전국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일본 게임 '노부나가의 야망'이 한국어로 번역되어 들어올 때 한국식 발음 그대로 '신장의 야망'으로 잘못 번역되어 들어오기도 했습니다.
사찰 엔랴쿠지(延曆寺, 연력사)를 불태워 버린 이후 '제육천마왕'이라는 악명을 얻었습니다.
사찰을 불사르고 승려와 많은 사람들을 죽인 일에 대해 지탄을 받으며 "신벌이 있을 것이다."라는 비난의 말을 들은 오다 노부나가는 오히려 오만하게 "나에겐 '제육천마왕'이 깃들어 있으니, 신벌도 두렵지 않다."라고 대꾸하였습니다.
이후 공문서 등에 서명할 때도 한동안 "제육천마왕 오다 노부나가"라고 서명하기도 했습니다.
붉은 귀신을 뜻하는 아카오니(赤鬼)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수행을 방해한 악마와 유혹의 화신, 제육천마왕 마라 파피야스
제육천마왕(第六天魔王)이란 석가모니의 수행을 방해한 악귀 '마라'를 뜻합니다.
마라, 천자마(天子魔), 마왕, 파순, 제육천마왕, 타화자재천왕, 마군(魔軍), 마구니(魔仇尼), 나무치, 불령해탈(不令解脫, 해탈을 방해하는 자) 등의 다양한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사탄, 인도 신화의 카마데바, 조로아스터교의 악신 앙그라 마이뉴와 동일시되며, 마귀 마(魔)자는 마라 파피야스의 이름을 칭하기 위해 만들어진 한자입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풍신수길), 대머리 쥐(禿げ鼠)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일으킨 원흉으로, 조선왕조실록에 자주 기록되었기에 풍신수길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미천한 출신으로 태어난 기노시타 도키치로(木下藤吉郎)는 이후 키노시타 히데요시(木下秀吉),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로 여러차례 개명합니다.
배움이 모자라 글을 읽을 줄 몰랐던 문맹임에도 불구하고 주군을 향한 지나친 아첨과 아부를 통해 크게 출세한 인물로, 망상이 심하고 평생에 걸쳐 정신병적인 행보를 보이며 자존심이라고는 없는 인물이지만 특이하게도 일본인에게는 출세(出世)의 상징으로 여겨지며 존경받는 인물입니다.
눈이 오는 날 오다 노부나가의 신발을 품에 안고 있어 따뜻하게 데웠다는 일화로 유명한데, 비굴할 정도로 아첨하는 모습이지만 일본에서는 왠지 맹목적인 충성심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오다 노부나가의 변소지기에서 시작해 충성심을 과장되게 표시하며 큰 신임을 얻은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주군이었던 오다 노부나가의 사후, 정권과 오다 가문의 재산을 통째로 빼앗아 일본 전역을 통일하며 큰 권력을 얻었지만, 타고난 신분상 높은 관직명을 얻지 못해 태합(太閤, 타이코)이라는 관직을 만들어 스스로 군림합니다.
오다 노부나가는 히데요시를 부를 때 이름을 부르지 않고 별명인 원숭이(猿, サル, 사루)라고 불렀다고 알려져 있는데, 실제로는 대머리 쥐(禿げ鼠, 하게 네즈미)라고 불렀습니다.
원숭이를 뜻하는 사루라는 표현은 히데요시의 부인 네네에게 보낸 사적인 편지에서 보이는 표현입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덕천가강), 간토의 너구리(関東の狸)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몸이 퉁실퉁실하고 성격이 능글맞다 하여 너구리(狸, 타누키)라는 별명이 붙었지만 본인은 이 별명을 싫어했다 합니다.
전국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에서 너구리라는 비유나 호칭이 사용된다면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뜻합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일으키며 국력을 소비하고 있을 때 조용히 힘을 모으며 기다렸다가, 히데요시 사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하며 전국시대를 종식시키고 일본 열도를 통일하여 에도막부(江戸幕府) 시대를 열어 초대 쇼군(将軍, 정이대장군)으로 등극했습니다.
이후 임진왜란으로 단절되었던 조선과의 외교 관계도 정상화 하였으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 막부는 일왕을 다시 옹립하려는 존왕양이 운동이 일어난 근대화 시기 이전까지 약 260년간 일본을 통치했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일본에서는 느긋함, 기다림의 대명사와 같은 인물입니다.
다케다 신겐(武田信玄, 무전신현), 카이의 호랑이(甲斐の虎)
다케다 신겐(武田信玄)은 생전에 딱히 호랑이를 연상시키는 행동을 한 적은 없지만, 라이벌로 유명한 우에스기 겐신의 별명이 용(龍)이었기 때문에 용호상박(龍虎相搏), 경쟁자의 의미로 호랑이(虎, 토라)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다케다 신겐의 근거지인 카이 지역이 호랑이가 기거할만큼 우거진 숲이 많은 산간지방이기도 합니다.
우에스기 겐신(上杉謙信, 상삼겸신), 에치고의 용(越後の龍) 또는 군신(軍神)
우에스기 겐신(上杉謙信)은 실제로 '용(龍)'이라 쓴 깃발을 사용했다고 전해집니다.
스스로를 비사문천(毘沙門天, びしゃもんてん)의 화신이라 믿었으며, 배신과 계략이 판을 치던 전국시대에 정의와 신의를 저버리지 않으려 노력한 특이한 인물입니다.
전장에서 뛰어난 군략을 보여 군신(軍神)이라고도 불렸습니다.
호조 우지야스(北条氏康, 북조씨강), 사가미의 사자(相模の獅子)
호조 우지야스(北条氏康)는 다케다 신겐, 우에스기 겐신과 짝을 이루는 관동(칸토)지방의 패자입니다.
이름이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능력만을 놓고 본다면 다케다 신겐이나 우에스기 겐신과도 대등하게 비견할 수 있다고 평가받는 인물입니다.
모리 모토나리(毛利元就, 모리원취), 모신(謀神) 또는 서국 제일의 다이묘(西国一の大名)
다케다 신겐, 우에스기 겐신, 호조 우지야스와 비견되는 주고쿠 지방의 패자입니다.
희생을 최소화하며 최대의 효과를 내기 위해 평생동안 모략과 암살을 자주 행했습니다.
화려함은 없지만 주로 내부의 정치적인 조략을 통해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놓는 희대의 책략가로 평가받습니다.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 이달정종), 오슈의 독안룡(奥州の独眼竜)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의 별명인 독안룡(独眼竜)은 다섯 살 때 천연두를 앓아 한쪽 눈을 잃었기에 생긴 별명으로, 그의 인생을 조명한 독안룡 마사무네(独眼竜 政宗)라는 제목의 NHK 대하드라마로 역대 최고 시청률을 찍은 바 있습니다.
그는 한쪽 눈을 잃은 것으로 인해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에게도 외면당하고, 본인도 이것을 컴플렉스로 여겨 얼굴을 드러내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다테 마사무네는 한쪽 눈을 가리는 안대와 특징적인 초승달 모양의 투구로 유명합니다.
오슈, 센다이 지방의 다테 가문, 그 중에서도 이 독안룡의 인기는 대단해서 그 지역에는 독안룡 술, 마사무네 떡, 마사무네 도시락, 마사무네 파르페 등 다양한 특산품이 존재합니다.
독안룡은 한쪽 눈을 잃은 애꾸를 칭하는 반 대명사가 되어 일본어 사전에도 실려있습니다.
하지만 독안룡이라는 단어의 기원이 다테 마사무네의 별명에서 유래된 것은 아닙니다.
원래 독안룡은 중국 오대십국시대 군웅인 이극용의 별명에서 유래한 단어입니다.
사이토 도산(斎藤道三, 재등도삼), 살무사(蝮)
사이토 도산(斎藤道三)은 센고쿠 3효웅(梟雄, 잔인한 영웅)의 한 사람입니다.
온갖 권모술수로 지위를 쌓아올린데다 냉혹한 성격으로 자신을 천거해준 은인과 자신을 중용해준 주군마저 추방하여 살무사(蝮, 마무시)라는 별명이 붙여졌습니다.
호조 소운(北条早雲, 북조조운), 나라 훔치기 명인(国盗り名人)
호조 소운(北条早雲)의 본명은 이세 모리토키(伊勢盛時, 이세성시)로, 센고쿠 3효웅 중 한 사람입니다.
말 그대로 교묘한 계략으로 쇼군가의 일원인 아시카가 챠챠마루(足利茶々丸)의 성과 나라를 빼앗아 이즈 지역의 패권을 장악했습니다.
아마고 츠네히사(尼子経久, 니자경구), 이즈모의 늑대(出雲の狼)
아마고 츠네히사(尼子経久) 역시 센고쿠 3효웅의 한 사람으로서, 늑대처럼 교활하고 영악한 권모술수로 가문의 번영을 가져온 것으로 악명이 높습니다.
생전에 주코쿠 11개국을 제패했기에 '서국재상'이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습니다.
류조지 다카노부(龍造寺隆信, 룡조사륭신), 히젠의 곰(肥前の熊)
류조지 다카노부(龍造寺隆信)는 외모 또한 곰처럼 퉁퉁하였고, 음흉하고 냉혹한 성격과 무략으로 류조지 가를 큐슈 3강으로 불리는 강대한 세력으로 만들었습니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소서행장), 기독교 다이묘(キリシタン大名)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 침략의 선발대로 최초로 수도 한양을 점령하고 평양까지 진격하였지만 선조를 찾지 못하였고, 보급이 끊겨 조선 곳곳을 약탈하며 백성의 삶을 유린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고니시 유키나라라는 일본식 발음의 이름보다 소서행장이라는 이름이 더 유명할 정도이며, 평행장(平行長) 혹은 행장(行長)이라 표기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카톨릭 신자였기에 기리시탄 다이묘(キリシタン大名)라고도 불리며, 기독교를 믿는 신자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민간인을 향한 무자비한 살육과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정유재란의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에서 전라도 순천 왜교성에 포위되어 완전히 갇힌 고니시 유키나가는 명나라 장수 유정과 진린에게 뇌물을 주어 활로를 확보하려 했으나 이순신 장군에게 퇴로가 막히게 됩니다.
그러나 소 요시토시, 시마즈 요시히로 등 다른 다이묘들이 고니시를 구하기 위해 500여척의 함선을 이끌고 구원하러 노량 해협에서 사투를 벌이는 사이, 구원병들과 합류하여 전투를 벌이지 않고 남해를 돌아 혼자 일본으로 도망갑니다.
이후 일본의 향방을 가르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어린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편으로 참전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대패하게 되며, 자신이 기독교인임을 강조하며 자살은 할 수 없다고 할복을 거부합니다.
이후 한참을 괴롭힘 당하고 조롱당하다 참수되어 목이 잘리는 최후를 맞이합니다.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 가등청정), 호랑이 가토(虎狼─加騰)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는 임진왜란 당시 선봉대에 섰던 인물로 우리에게 가등청정이라는 이름으로 더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시동 출신인 가토 기요마사를 비롯하여 큰 공을 세웠던 무장 7인을 '시즈가타케의 칠본창'이라고 칭하기도 하며, 위로 과도하게 치솟은 투구를 쓴 모습으로도 유명합니다.
임진왜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불임 증세에 시달렸는데 불임 치료에 호랑이 고기와 고환이 효과가 있다는 얘기를 들은 가토 기요마사는 임진왜란 기간동안 틈나는 대로 조선의 호랑이를 사냥해서 일본에 보냈습니다.
이에 당대 조선사람들이 그를 '호랑이 잡는 가토'라 불렀습니다.
호랑이처럼 용맹해서 붙은 별명이 아니라, 호랑이를 잡는 데 심력을 쏟았기에 붙여진 별명입니다.
임진왜란 초기 빠른 진격으로 유명했지만 이후 울산성 전투에서 조명연합군에 포위당해 아군의 시체까지 뜯어먹으며 처절한 공성전을 벌였습니다.
이후 엄청나게 많은 조선인 건축기술자를 포로로 잡아가 자신만의 축성기술을 갈고 닦고 비상시에는 다다미까지 뜯어먹을 수 있도록 토란 줄기를 엮어넣는 등 군량 방어태비를 갖추는데 심력을 쏟았습니다.
구마모토 성을 쌓는데 그 기술을 꼼꼼히 사용하는데, 기요마사류 건축술이라는 한 분야가 탄생하기도 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일본에 돌아가 도요토미 군을 배신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붙어 승리하고 천수를 누립니다.
경상도에서 전해지는 민요인 쾌지나 칭칭 나네가 가토 기요마사가 도망가는 모습을 축하하는 노래입니다.
'쾌재라, 청정이 나가네'가 축약된 말로 쾌재(快哉)는 마음먹은 대로 일이 잘 풀리는 것을 의미하고, 청정은 가등청정, 가토 기요마사의 한국식 한자발음입니다.
시바타 카츠이에(柴田勝家, 시전승가), 독 깨기 시바타(瓶割り柴田), 오니 시바타(鬼柴田)
시바타 카츠이에(柴田勝家)는 적의 맹공으로 인해 성에 틀어박힌 성에 틀어박힌 채 고립된 적이 있는데, 큰 항아리에 남은 물을 모두 모아 병사들에게 한 사발씩 먹이고 자신의 창으로 항아리를 깨면서 "이제 성에 남은 물이 없으니 죽기로 싸우는 일만 남았다"며 병사들을 고무시켜 그와 그 병사들은 죽을 힘을 다해 싸워 적의 포위망을 돌파, 성에서 탈출하여 퇴각하는 데 성공해서 독 깨는 시바타(瓶割り柴田)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오니(귀신)'이라는 별명이 붙은 무장은 전장에서 피아간에 경외심을 느끼게 할 정도의 귀신과도 같은 뛰어난 무용을 발휘한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전장에서 무작정 싸우라고 고함을 많이 질렀다 하여 '싸워라 시바타(かかれ柴田)'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으며, 동네 어린이들이 그의 별명으로 노래를 지어 부르고 다녔다고 합니다.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도진의홍), 꾸이시만쯔(鬼石曼子, 귀석만자)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는 임진왜란 당시 사천 전투에서 1만 2천으로 20만의 명군을 대파한 뒤, 명군에서 '귀석만자(鬼石曼子)'라고 부르며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고 전해지는데, 이것은 순전히 일본측 기록에서만 등장하는 내용이며 당대의 조선 사람들은 귀석만자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고 합니다.
조선에서 도공을 많이 납치해 간 것으로 유명하며, 전쟁 전반에 걸쳐 조선의 도자기를 수집하거나 도자기술을 가진 사람들을 납치하는데 주력했습니다.
전라도에서 납치되어 시마즈 영지에서 살게된 도공의 가문이 대를 이어 도자산업을 번창시켰으며, 도고 가문의 족보를 구입한 후손 중 한명인 도고 시게노리, 한국명 박무덕(朴茂德)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제 58대, 63대 일본의 외무대신을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마지막 전투인 노량 해전에서 고니시 유키나가를 구하기 위해 다치바나 무네시게 등과 함께 연합 함대를 꾸려 500여척의 대선단으로 노량 앞바다로 들어섰지만 이순신 장군의 함대에게 궤멸당하고 관음포에서 전멸의 위기에 처합니다.
함대 대부분을 잃었지만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하여 일본으로 돌아가서 사망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잔당인 서군에 붙어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대적하지만, 대패하여 휘하의 모든 장졸들을 잃고 본인 혼자만 겨우 목숨을 부지하여 큐슈로 돌아갑니다.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일본을 평정한 뒤 시마즈 요시히로를 죽이려 했으나 시마즈 가문의 일원이 모두 나서서 치매가 들어 미친 선택을 했을 뿐이니 용서해달라고 목숨을 구걸했고, 이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시마즈 가문을 용서하게 됩니다.시마즈 요시히로는 말년에 실제로 치매에 걸려 똥오줌을 가리지 못하고 고통받았지만 꽤나 오래 살았으며 85세의 나이에 죽었습니다.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 구귀가륭), 해적 다이묘(海賊大名)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는 본디 쿠마노 지역의 해적 출신으로, 모리 수군을 상대로 큰 활약을 펼쳐 전국시대 최고의 해전 전문가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임진왜란 도중 안골포에 정박하고 있었던 구키 요시타카는 이순신 장군의 습격을 받았고, 안골포 해전에서 병력의 절반을 잃게 됩니다.
본인이 타고있던 기함 니혼마루를 방벽으로 삼아 부하들을 구조하는 중에 조선군이 발사한 대장군전에 피격당했고, 구키는 그 대장군전을 기념품 삼아 챙기고 육로로 도주하였습니다.
구루지마 미치후사(来島通総, 래도통총), 구루시마 이즈모의 무사(來島出雲殿)
구루지마 미치후사(来島通総)는 무라카미 지역의 해적 출신으로,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서 마다시(馬多時)라고 표기된 인물입니다.
정유재란 당시 명량 대첩에서 선봉을 맡아 이순신 장군에게 대항했지만 대패하고 난전 끝에 사망했습니다.
항왜 장수 준사가 바다에 떠있는 시체들 가운데 구루지마의 얼굴을 알아채자 이순신 장군은 부하 김돌손을 시켜 시신을 건져오게 하여, 토막내고 높이 걸어 일본군의 사기를 꺾었다 전해집니다.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협판안치)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최측근이었던 시즈카타케의 칠본창(賤ヶ岳の七本槍)중 한 사람으로, 임진왜란에서 육전에 매우 강한 면모를 보이며 용인전투에서 몇배나 되는 조선군을 기습하여 패퇴시키기도 했습니다.
칠천량 전투에서는 원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을 격멸하는데 성공하기도 했지만 그 이전의 한산도 대첩, 이후의 명량 해전에서 이순신에게 대패하여 일본에서는 그 평가가 별로 좋지 못합니다.
한산도 대첩에서 대패한 와키자카는 조선의 추격 선단을 피해 달아나다가 어떤 무인도에 고립되었고, 구출되기 전까지 조선군의 수색을 피해 10일간 표류하며 섬에서 나는 미역만 먹었다는 일화가 유명합니다.
와키자카 가문은 지금까지도 한산도 대첩이 벌어진 7월 8일에는 집안 전체가 미역만 먹는 풍습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 등당고호)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는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을 궤멸시킨 장수이지만, 이순신 장군을 상대로 한번도 이겨보지 못한 일본 수군의 실질적인 수장입니다.
첫 해전부터 이순신 장군과 맞붙어 싸워 마지막 해전까지 몇 번이고 이순신에게 패했지만, 여러번 큰 부상을 입었을지언정 결국 살아남아 일본으로 돌아간 것이 용한 장수입니다.
히데요시 사후 다음 일본의 패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될 것이라 판단한 도도 다카토라는 재빠르게 이에야스의 동군으로 전향했으며,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하여 에도 막부의 중신이 되었습니다.
구로다 나가마사(黒田長政, 흑전장정)
구로다 나가마사(黒田長政, 흑전장정)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군사로 유명한 책략가, 구로다 칸베에의 아들입니다.
임진왜란 초반 김해에 상륙해서 경상우도를 휩쓸고 추풍령으로 북진, 고니시 유키나가와 함께 평양성을 점령한 후 황해도까지 진군하는 등 육전에서 엄청난 활약을 보입니다.
전쟁이 끝난 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에 붙어 큰 공을 세우고 에도 막부의 중신이 됩니다.
대표적인 기리시탄(그리스도 교인), 카톨릭 신자였으며 세례명은 다미아노라고 전해집니다.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 가등가명), 침묵의 용장(沈勇の士)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 가등가명)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최측근인 시즈가타케 7본창 중 한명으로, 냉정하고 침착한 성격이었다고 전해집니다.
임진왜란 당시 수군에 속해 이순신 장군을 만날 때 마다 패했지만,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고 울산 왜교성에 포위되어 고립된 가토 기요마사를 구출하는 공을 세우기도 합니다.
카토 요시아키는 전쟁이 끝난 직후 일본으로 돌아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으로 전향합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군의 승리가 확정되고, 달아나는 서군 군사를 서로 앞다투어 뒤쫓는 상황에서 오직 요시아키의 군사들만이 진형을 갖추어서 진격하는 모습을 보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감탄했다고 전해집니다.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 우희다수가), 비젠 재상(備前宰相)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양자로, 히데요시가 가장 아끼고 사랑했던 부하입니다.
1592년 임진왜란 때에는 약 20세의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의 총대장으로 참전하여 벽제관 전투에서 승리하는 등의 공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행주대첩에서 권율 장군에 맞서 싸우다 대패하여 큰 부상을 입습니다.
히데요시의 양자였기에 임진왜란이 끝난 후 서군으로 참전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대패하고 숨어지내다 발각되어 평생을 섬에 유폐되어 살게됩니다.
하치조 섬이라는 곳에 유배되어 50년간 살다 83세의 일기로 사망합니다.
여러 국가들을 거치며 만들어진 '뜌땨 뜌우따~' 밈의 기원과 유래.jpg
[사진으로 보는 역사] 친일파 매국노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 총정리
임진왜란 당시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을 뜯어 말렸던 인물.jpg
충무공 이순신에 대한 명나라 장수들의 평가
'생활 정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돌프 히틀러의 어린 시절 생활기록부 (82) | 2024.01.26 |
---|---|
[징비록, 임진왜란] 부하에게 자살을 명령하는 사령관 (89) | 2024.01.25 |
원격제어 어플로 내 스마트폰 에어컨 리모컨으로 바꾸기 (106) | 2024.01.23 |
버섯커 키우기 쿠폰 모음 패키지 교환 코드 목록과 입력방법 (103) | 2024.01.22 |
KT 기가지니, LG 씽큐 앱 다운 및 가입, 연동방법 (103) | 2024.01.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