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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기억] 대한민국 vs 일본, 변화하는 한국과 변하지 않는 일본.jpg

by cutekorean 2024. 6. 29.

목차

    [역사, 기억] 대한민국 vs 일본, 변화하는 한국과 변하지 않는 일본.jpg

    1945년 3월 10일...

    72년전 우리들 일본인은 공습경보가 울릴 때마다 두더지처럼 지하에 몸을 숨겼다.
    아득한 상공을 날으는 B-29에서 쏟아 붓는 무수한 폭탄
    기지나 군수공장만이 아니고 지상에서 움직이는 모든 것이 우리의 표적이었습니다.
    투하된 소이탄 2040만 발.
    초공의 요새라고 불리는 B-29는 미군이 일본 본토를 공습하는 주력이었다.
    이 폭탄이 우리 집 뒤에 떨어져 사람들이 계속 죽었다.
    폭탄으로 흙이 입이나 눈, 귀에 많이 들어갔습니다.
    이렇게 만세하는 모습으로 '아' 하면서 죽었습니다.
    제21폭격기 집단 사령관 커티스 르메이 소장, 도시의 무차별 폭격으로 독일을 괴롭힌 지휘관입니다.
    르메이는 본토 공습의 방침을 정밀폭격에서 무차별 폭격으로 크게 전환시켰습니다.
    군사 공장에 맞추는 것이 어렵다면 도시 전체, 주민 자체도 표적으로 하는 작전입니다.
    민가 중에도 작은 공장이 섞여 있으니 무차별 폭격을 정당화 했습니다.

    '무고한 민간인은 없다' 전쟁의 참혹함을 상징하는 커티스 르메이 장군의 발언

    There are no innocent civilians. It is their government and you are fighting a people, you are not trying to fight an armed force anymore. So it doesn't bother me so much to be killing the so-called innocent bystanders.
    무고한 민간인은 없다. 그것은 그쪽 정부와 함께 우리와 싸우는 민중들이고 우리는 무장한 적군하고만 싸우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소위 죄없는 방관자를 죽이는 것을 나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According to General LeMay the Japanese model of production was intricate and complex. He described in his memoirs: "In Japan they would be set up like this: they’d have a factory; and then the families, in their homes throughout the area, would manufacture small parts. You might call it a home-folks assembly line deal. The Suzuki clan would manufacture bolt 64; the Harunobo family next door might be making nut 64, 65, or 63, or all the gaskets in between. These would be manufactured right in the same neighborhood. Then Mr. Kitagawa from the factory would scoot around with his cart and pick up the parts in proper order."
    커티스 르메이에 따르면 일본의 생산방식은 복잡하고 밀착되어 있었다. 그는 회고록에서 설명했다. "일본은 실제로 이렇게 되어 있다. 공장이 하나 있다. 인근의 가구들은 집에서 작은 부품을 제조한다. 그걸 가내수공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스즈키네는 64호 볼트를 제조하고, 옆집의 하루노보 가족은 64호, 65호나 63호 너트 그리고 기타 잡동사니를 만든다. 이웃에서도 똑같은 걸 제조한다. 그러면 공장에서 나온 키타가와씨가 손수레를 끌고 정해진 순서대로 부품을 가져간다."
    - Mission with LeMay: My Story 1965, p. 384

    3월 10일 소이탄을 가득 채운 B-29 325기가 일본을 향했습니다.
    도쿄 대공습(동경 대공습) 입니다.
    아사쿠사에서 공습을 받은 시바타 에키 씨 (당시 13세) : 소방차가 호스로 물을 뿌려도 꺼지지 않는 것입니다.
    불탄 시체가 굴러다니고
    게다가 소이탄에 의한 불이니까, 말하자면 하늘에서 가솔린을 뿌려 불을 붙이는 것 같은...
    한편 미국에서 르메이 소장은 공습 다음날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나는 약속한다."
    "만약 일본놈들이 이 전쟁을 계속할 생각이라면"
    "녀석들에겐 모든 도시가 완전히 파괴된 미래 밖에 기다리고 있지 않을 것이다."

    전쟁이란 이런 것이다, 오로지 적과 나, 죽일 상대와 죽고싶지 않다는 공포만이 있을 뿐

    일본인이 다 죽든 말든 그들은 어차피 인간이 아닌 적.
    그게 전쟁인 것입니다.
    유황도에서는 7000명 가까이 동료들이 죽었습니다.
    '적진의 맨 가운데 들어가 일본인을 죽인다'라는 살의가 제 가슴 속에 있었던 것은 확실합니다.
    기총소사의 타겟은 지상에서 움직이는 모든 것이었습니다.
    일본에 있는 모든 것이 공격 목표였던 것입니다.
    거기에 사람이 있든 없든 관계 없었습니다.
    나는 비행기에서 적을 마구 쏴대는 것에 열중해 있었습니다.
    움직이는 모든 것이 표적이 되었다.
    "어쨌든 일본인을 죽이자" 그것이 임무였습니다.

    그 끔찍한 전쟁을 일으킨 것이 자신들이라는 자각이 없는 무책임한 가해자, 일본인들

    도쿄 대공습.

    이 날 하루의 폭격으로 10만명의 도쿄시민이 사망...

    수 십년동안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에게 말도 못할 살육과 피해를 주었고 식민지로 만들었던 일본은 늘 자신들이 저지른 일에 대해선 숨기고 항상 당한 일만 부풀려서 피해자 행세를 했습니다.

    일본은 일제 강점기 시절 한국을 상대로 저질렀던 강제동원이나 위안부 문제 등의 만행은 늘 덮고 대충대충 뭉개기에 바빴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당한 일에 대해서는 매번 “억울하다.”는 입장을 보이며 70년이 지난 지금까지 피해자 행세를 했습니다.

    2023년 5월 히로시마에서 열린 G7 정상회의에서 미국 대통령 조 바이든을 포함한 각국 정상들은 일본 총리를 따라, 원자폭탄의 참상이 고스란히 전시된 원폭자료관을 40분 정도 참관했습니다.

    참관을 마친 조 바이든은 기시다 후미오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위로하는 듯한 포즈를 취하기도 했습니다.

    일본의 대표적인 극우 언론이자 자민당 기관지나 다름없는 산케이신문을 비롯해 일부 일본 언론들은 '조 바이든이 원폭에 대해 사과하지 않는다'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으며, 또 히로시마의 한 방송사는 '바이든 대통령이 원폭 투하에 대해 일본에 사과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원로 정치인의 인터뷰를 보도하기도 했습니다.

    카메이 시즈카 : "미국 국민을 대표해서 (바이든) 대통령이 히로시마 시민에게 사과를 해야 합니다."

    지금까지도 그 날의 폭격을 잊지 못하고 사과를 받아야겠다는 일본과, 이제는 이웃나라라면서 수 십년 침탈과 식민지 지배를 받았던 과거는 잊고 일본과 손을 잡아야한다는 우리 정부를 보며 복잡한 심정을 느낄 수 밖에 없었습니다...

    1945년 일본의 항복을 받아낸 미국은 일본이 다시는 전쟁을 하지 못하도록 농경위주의 사회로 만들 계획이었다. 그러나 한국전쟁 발발로 일본에 대한 미국의 계획은 전면 수정되었다. 한국전쟁을 위한 병참, 후방기지로 변경되었으며, 오히려 미국의 대량생산기술 이전 등으로 단번에 기사회생 할 수 있는 경제재건의 발판을 마련했다.
    자민당 설립자이자 6.25전쟁 당시 일본 우익의 대표자였던 고마다 요시로가 맥아더 장군에게 '일본 참전 요청서'를 보내 "동양인은 동양인이 잘 안다"며 참전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그 대가로 한반도를 다시 통치할 수 있게 해줄 것을 요구했다는 것이 2001년 드러났다.

    동족 상잔의 아픔, 한국전쟁을 기회로 삼아 한국인의 피를 빨아먹으며 성장한 일본의 경제

    35년간의 일제 식민지배로부터 가까스로 독립을 이룬 대한민국은 광복의 기쁨도 잠시, 한국전쟁 발발로 국토는 분단되고 한민족에게 씻을수 없는 상처와 절망을 남겼습니다.

    역사적으로 한반도의 비극은 일본 국운의 상승을 의미하며, 일본이 강대해졌을 때 그들은 항상 한반도를 겨냥했었습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의 총리 요시다 시게루는 다음과 같이 외쳤습니다.

    요시다 시게루 일본 총리 : "(한국전쟁) 이거야말로 천우신조다. 이를 발판으로 일본 경제를 다시 일으킬 수 있다."

    한반도의 전쟁과 동족상잔의 비극은 패망으로 국운이 기울던 일본에게 새로운 기회와 희망으로 다가왔습니다.

    한국전쟁 기간동안 일본이 병참, 후방기지로 누린 경제적 효과는 약 36억 달러...

    2차대전 시기에 활약했던 미쓰비시 등 전범기업들의 기술력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었던 일본은 미국의 대량생산 기술까지 습득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일본의 경제는 눈에 띄게 좋아졌습니다.

    그 당시 일본의 1년 국가예산이 약 21억불 수준...

    한국전쟁의 특수로 누린 약 36억불은 패망 후 1920년대 수준이었던 경제를 단숨에 회복시키고 패전의 잔흔을 지워 버리기에 충분했습니다.

    또한 일본은 미국과의 안전보장조약으로 우리와 달리 국방예산으로 쓸 돈이 모두 경제로 흘러들어가게 되면서, 향후 일본이 선진국으로 갈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습니다.

    이렇게 빠른 회복과 고도성장을 이룬 일본은 1964년 도쿄 올림픽을 개최함으로써 일본의 부흥을 전 세계에 알리게 되었습니다

    일본과 달리 단지 살아남고자 몸부림쳐야만 했던 한국의 대비되는 상황

    일본이 한국전쟁을 발판삼아 고도성장을 이루고 있을 때...

    대한민국의 모든 사람들은 생존과의 처절한 싸움을 시작해야 했습니다.

    일제 식민통치 35년과 6.25 전쟁의 상흔은 너무 길고도 깊었습니다.

    자원 하나 없이 모든 것이 백지가 된 상태에서 새로 시작해야 되는 대한민국의 국민들에게 유일한 위안은, 폐허가 된 맨 땅일 지언정 독립을 이룬 나의 조국이 있다는 것 뿐이었습니다.

    폐허가 된 나라의 재건을 위해, 언제든 다시 재발할지 모르는 전쟁의 두려움을 이겨내고 부모님들은 다시 팔을 걷어부치고 일어나야 했으며, 그것은 위대한 헌신의 시작이었습니다.

    파독 간호사, 파독 광부라 불리우던 부모님들의 젊은 시절과 바꾼 땀과 눈물의 돈...

    연간 5000만 달러는 고스란히 대한민국의 재건의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가족들 중 누군가 삶의 무거운 고통을 대신 짊어져야 한다면 자신이 짊어지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그분들은, 40도가 넘는 무더운 온도의 수킬로미터 땅속에서 땀에 젖은 팬티와 장화를 하루에 열 번이상 쏟아내었고, 깜깜한 어둠속에서 서로에게 의지하며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내야 했습니다.

    어머니들은 자신의 몸보다 배는 큰 서양남자를 하루에도 수십번씩 들어올리며 간호해야 했습니다.

    대소변을 받아내면서 수치스러움을 참아내고, 벌거벗은 서양남자들을 목욕시키며 펑펑 울어야 했습니다.

    공장 노동자들의 40%가 평균연령 15세 이하인 여성 청소년과 어린이였던 시기...

    열 세살 때 이름 대신 7번 시다로 불린 어머니들과 누이, 누나들은 2평 남짓한 공간에 천장이 낮아 허리도 못편 채 재봉틀 기계와 함께 15명이 작업해야 했습니다.

    창문이 없어 햇빛은 안들어오고 먼지만 가득 찬, 환기도 안되는 공간에서 하루 13~16시간을 일하면서 폐결핵이 유행하기도 했던 시기였습니다.

    아버지들의 숭고한 피와 희생은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것이라고 평가받았던 대한민국을 기적같이 일으켜 세웠습니다.

    미군 다음으로 많은 월남전 파병자 32만명의 피와 희생의 값으로, 대한민국이 북한의 위협에 대응할 수 있는 무기와 함께 벌어들인 돈은 약 10억 달러...

    한국전쟁 특수에 힘입어 경제적 도약을 마련한 일본이 또다시 베트남 병참기지 역할을 수행하며 파병없이 손쉽게 벌어들인 돈의 10분의 1 수준에 불과 했으나, 사회간접자본과 중화학공업에 투자되어 경제 도약의 발판이 되어준,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돈이었습니다.

    6.25 한국전쟁으로 큰 경제적 수혜를 입은 일본이 황홀한 부를 누리던 버블 시기

    6.25와 베트남전쟁 특수를 누린 일본은 축적된 기술력으로 칼라TV , 소형 라디오로 세계시장을 장악하기 시작했으며, 오일쇼크를 거치면서 도요타의 자동차까지 미국에 진출하게 되었습니다.

    가격과 품질이 좋았던 일본제품들의 인기는 높아져 갔고, 그 기세는 대단했습니다.

    일본인들의 자신감이 커져만 갔던, 대단했던 시기였습니다.

    1980~1990년대 미국시장까지 점령하게 되면서, 결국 세계 최대 자동차 생산국이 된 일본의 기세에 급기야 미국은 기업 생산성 저하로 경기가 침체되고, 미국의 제조업은 경쟁력을 잃게 되어 일본에 대한 적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었습니다.

    < 이제 막 첫걸음을 떼었던 한국의 첫 독자생산 국산 자동차 1호 '포니'와 일본 자동차 제조사 중 가장 오래된 '이스즈' >

    아시아의 거의 대부분의 국가가 기술력에 대한 부담과 개발의 한계에 부딪치면서 자동차 개발을 포기하였고, 최근까지도 일본 자동차를 구입하면서 자동차 분야에 관해서는 거의 종속되다시피 했습니다.

    하지만 대한민국만은 달랐습니다.

    한국인의 열의와 포기하지 않았던 집념으로 인해 대한민국은 일본에 이어 아시아에서 두 번째 자동차 독자 생산국이 되었고, 이는 새로운 가능성을 연 시작이였습니다.

    역사상 유례없는 호황을 누린 일본...

    그리고 벌어들인 달러와 넘쳐나는 자본으로 미국의 부동산을 무차별적으로 사들이는 일본을 보면서 미국의 충격은 상당히 컸습니다.

    미국의 상징이며 뉴욕의 심장 록펠러 센터...

    록펠러 센터가 일본으로 넘어가자 많은 미국인들은 "제 2 진주만 기습" 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니시무라 요시마사 / 와세다대 경제학부 교수 : 1980년대 후반 일본에서 자주 하는 말들 가운데 '이제 유럽이나 미국에서 배울 것은 없다', '재팬 이즈 넘버원'이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일본 경제 운영방식은 세계에서 가장 잘 나가고 있다.'

    칼을 빼든 미국, 플라자 합의로 평가절하 된 엔화 가치를 재조정하다

    미국은 일본과 독일과의 무역적자가 누적되면서 심각해지자, 1985년 플라자합의를 통하여 엔화와 마르크화를 절상시키는 합의를 했습니다.

    엔화와 마르크화의 가치가 고평가 되면서 가격경쟁력이 생긴 미국의 산업 경쟁력이 회복될 수 있었고, 여기에 한국도 올라타면서 우월한 가격 경쟁력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80년대에 이르러 이른바 3저 호황, '저유가, 저금리, 저달러'를 바탕으로 한국경제도 무릉도원에서 꽃놀이 하는 시절이 시작됐습니다.

    지금도 누군가는 말합니다. '5공 시절이 더 살기 좋았다'고....

    그 시절이 좋았던 시기는 맞습니다만, 그 이유는 정치적인 리더쉽이 아닌 세계 경제가 호황의 시대였기 때문이라는 게 맞는 얘기입니다.

    심각하게 높아진 부동산 가격으로 인한 버블 붕괴, 서민들의 내 집 마련 포기, 결혼과 자녀 양육 포기.
    성실하고 정직하게 사는 것이 '바보'가 되어버린 가치 소멸의 시대.

    많은 일본인들이 미국의 플라자 합의 강요로 인하여 일본의 풍요로운 시대를 잃어버리고 '잃어버린 30년'이 도래했다고 얘기합니다.

    하지만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의 시작은 돈에 대한 일본인들의 끝없는 욕심의 결과물이었으며, 지금 우리의 모습과도 소름끼치게 닮은 모습들이었습니다.

    플라자 합의 이후에도 일본에는 큰 문제가 없었습니다.

    일본 제품은 이미 국제적으로 선망의 대상이 되었고, 내수시장 또한 워낙 탄탄해서 수출의존도는 30% 이상을 넘긴 적이 없었습니다.

    또한 일본과 같이 절상을 했던 독일도 큰 문제가 없었던 것을 보면 플라자 합의로 인한 경제가 주저앉은 것은 일본인들의 핑계에 불과합니다.

    단지 일본정부의 대처가 문제였습니다.

    엔화절상으로 인하여 수출 성장액이 둔화되는 건 분명하니 전체 경제성장률을 유지하기 위하여 부동산 시장 규제를 완화하고, 금리를 낮추면서 부동산 투자를 적극 권장했으며, 높아진 엔화가치를 보고 외환투자 자본도 대거 시장에 유입되면서 시장에 돈이 넘쳐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욕심으로 빚어진 버블이 터져버리면서 일본의 행복했던 시기는 저물고 말았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에서, 한 세대가 통째로 자신의 삶을 갈아넣어 빚은 대한민국의 영광

    한국인을 상징하는 '빨리빨리' 는 어느날부터 부정적인 단어로 인식되었습니다.

    나라와 기업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국민과 노동자의 희생을 당연시하고 안전을 소홀히 여겼던, 빠른 성과와 결과에만 집착했던 과거 때문일 겁니다.

    우리에게 '빨리빨리'의 다른 말은 '희생과 헌신'이었습니다.

    우리 부모님들의 삶은 '빨리빨리 '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리고 희생과 헌신의 결과는...

    한강의 기적...

    오늘도 세계가 우리에게 물어보는 질문, "가난을 이겨내고 한강의 기적을 이룬 한국인들의 저력과 성공비결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이렇게 묻는다면 누군가는 '새마을운동', ' 경제개발 5개년' 같은 산업화 노하우만을 얘기합니다.

    하지만 한국의 산업화 노하우는 전세계에 대놓고 하는 가장 큰 거짓말입니다.

    한국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보다 자식들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했던 부모님들과, 잘못된 권력에 굴하지 않고 싸웠던 우리 자신들이었습니다.

    한국과 일본, 과거를 제대로 청산하지 않은 채 손을 잡고 함께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가?

    가장 가까운 나라지만 우리를 가장 불행하고 고통스럽게 만들었던 가장 먼 나라 일본...

    한일 양국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항상 고통 받았던 것은 두 나라의 국민이었습니다.

    우리가 경계하고 질문해야 될 곳은 두 나라의 국민들을 불행하게 만들었던, 여전히 변하지 않은 일본의 우익과 정부가 맞습니다만, 그런 정부를 여전히 뽑아주고 있는 것도 역시 같은 일본인들입니다.

    광복 후 아직까지 변하지 않은 일본인들에게 한국인을 대신해 일본기자가 묻습니다...

    일본이 그 전쟁에서 범한 과오를 전후 충분히 반성치 않고, 청산하지 않은 채
    경제력만을 살찌워 왔다...라는 생각이 무의식 중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이 아시아에 대해 태평양 전쟁의 보상을 직접 적극적으로 해주려는 자세가 없다면
    앞으로도 아시아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얻으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현재의 일본 안에 과거와 닮은 대국의식에 의한 우월감이나 이기주의가
    또다시 고개를 들고 있는 건 아닐까요?
    이 시리즈를 하는 동안 저는 아시아 사람들로부터
    "일본인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지 않은가"라는 말을 몇번이고 들었습니다.
    전후 50여년이 지나 그러한 목소리에 일본 및 우리 일본인들은 어떻게 대답하고,
    그런 의문에 대해 대답할 시기가 오고있다고 생각합니다.

    1993년 NHK 다큐멘터리 '태평양 전쟁사' 중...

    원문 출처 : 한국 vs 일본 변하지 않는 일본 - 보배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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